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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울의 움직이는 성

by 찬란한 너 2023. 8. 11.

 

네 개의 세계

하울의 성문 안쪽에는 네 개의 색으로 나뉜 원판이 있다. 검정색, 파란색, 빨간색, 초록색으로 이뤄진 원판. 원판을 돌려 화살표가 선택한 색의 문으로 나가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물론 문의 색을 고르는 건 성 안의 주체들이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마법의 힘을 빌려서라도 이곳저곳을 누빌 수 있다면. 내 마음과 영혼을 마법의 힘에 맡겨서라도 문을 졎혀서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다면.

 

 

# 하울의 어린 시절

하울의 어린시절을 간직한 세계는 싱그럽고 아름답다. 하울은 어린시절 마법의 힘을 얻기 위해 불의 신 케르시파와 계약을 맺는다. 그 유명한 메피스토펠레스와 파우스트의 계약처럼 자신의 영혼을 맡기고 마법의 힘을 얻는다. 하울의 심장, 하울의 양심, 하울의 마음은 케르시파의 것이 된다. 마법의 힘을 얻은 하울은 상대적인 자유를 누린다. 파우스트가 그러했던 것처럼. 움직이는 성을 타고 노마드의 삶을 즐기며, 아름다운 미모를 유지한다. 먹고 살아야만 하는 현실의 중력에서 벗어나 그날 그날 하고 싶은 일들을 되는 대로 해나가는 것. 물론 마법사들의 벌인 세계 전쟁에 참여하거나 적들의 공격에 대처하며 몸을 피하기도 하지만 하울은 그리 심각해보이지 않는다. 그는 불사에 가까운 생을 얻었고, 허공을 날 수 있으며, 화려한 젊음을 유지하며 떠돌 수 있는 자유로운 청춘의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메피스토펠레스가 나타나 내게 일상의 무게로부터 벗어나 젊음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준다면 나의 영혼과 마음을 내맡기는 계약을 맺을 수도 있지 않을까?

 

 

# 각축전

황실의 마법사이자 하울의 스승인 설리만은 전쟁을 중요하게 여긴다. 전쟁을 통해서라도 자신이 지키는 황실의 국가 권력이 최고가 되길 바란다. 이해관계가 얽힌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하울은 스스로 수단이 되어 전쟁에 임한다. 전쟁의 도구로서 하울은 밤새 컴컴한 밤하늘을 날아 다니며 적군을 공격한다. 살상과 살육의 장이 펼쳐진 어둠 속에서 하나의 창이 된 하울은 지친 몸이 되어 자신의 성으로 돌아온다. 따뜻한 목욕물과 맛난 아침과 차가 있는 자신의 성 말이다. 하울에게 움직이는 성은 밀실이다. 누구도 쉽게 침범할 수 없는 자신만의 세계(밀실)를 위해서 전쟁의 소용돌이에 자신을 내던지는 하울. 전체 세계를 움직이는 권력의 힘 앞에서 개인의 자유는 때때로 사치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하울의 마법()은 툭하면 전쟁과 힘겨루기의 각축장이 되곤 하는 전체 세계에 대한 한 개인이 자신만의 밀실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투쟁의 결과일 수 있다. 하울은 저들의 싸움에는 아무 의미나 가치를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머리카락 색깔과 아름다운 외모, 자신의 성에 살고 있는 작고 여린 존재들에게는 한없는 소중함을 느낀다.

 

 

 

# 소피가 사는 마을

모자가게를 운영하는 소피가 사는 마을은 조용한 시골 마을이다. 기차는 사람들을 태우고 마을 한복판을 가르며 움직이고, 사람들은 마을의 중심지에 모여 축제를 즐기기도 한다. 시장에서 생선과 야채를 사서 저녁을 만들어 먹고 내일을 위해 잠에 빠져 드는 평화로운 마을이다. 이곳과 잘 어울리는 평범하고 조용한 아가씨 소피는 수줍음이 많다. 하루하루 현실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범인들이 그러하듯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되도록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묵묵하게 일상을 보낸다.

 

소피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로 다른 이들의 모자를 만들거나 수선하는 일을 한다. 선한 눈빛의 소녀의 순수함으로 가득한 소피의 영혼을 마주한 황야의 마녀는 질투심을 느꼈는 지도 모른다. 마법의 힘을 가졌지만 탐욕에 눈멀어 점점 허물어져 가는 자신이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순수한 영혼의 실체를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황야의 마녀는 흑마술을 통해 소피의 순수한 젊음을 빼앗는다. 하루아침에 할머니가 된 소피는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에 당

황하지만 울거나 주저 앉지 않는다.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든 채 자신의 집을 나와 유목민의 삶을 자처한다. '늙은 소녀'는 천천히 길을 걸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삶을 기대한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삶. 누구 앞에서라도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삶. 눈을 뜨면 펼쳐지는 낯설고 생경한 하루. 남은 시간이 별로 없으니 하고 싶은 대로 살기에도 짧은 삶에 대한 찬양. 소피는 젊음을 뺏기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삶이란 주체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펼쳐지는 낯선 세계이며, 단 한 번 주어진 기회라는 것 말이다.

소피는 움직이는 성의 가정부가 되어 모험을 자처한다. 그녀의 몸은 늙었으나 자아는 여전히 순수한 소녀이므로 여전히 꿈을 꾸고 사랑을 한다. 밤새 꿈을 꿀 때, 하울과 성을 지키기 위해 열정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야 할 때면 소피의 회색 머리칼은 검은 색으로 변하고 주름진 얼굴 사이로 분홍빛 얼굴을 한 소녀 소피가 나타난다.

 

시간의 마법에 빠진 소피를 통해 이 영화는 어쩌면 이런 말을 우리에게 건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꿈꾸고 사랑하는 영혼은 늘 젊고 아름다우며 자신의 세계를 펼쳐가는 동력이 된다는 것 말이다.

 

 

# 성이 걸어가는 길

성은 어디로 가는가? 성이 도달하고자 하는 이타케는 어디인가? 성은 늘 어디론가 걸어다닌다. 삐그덕 삐그덕 거리지만 성이 가는 곳은 자유로워보인다. 성은 켈시파를 동력 삼아 움직이지만 켈시파는 사실 하울의 마음이자 영혼이므로 움직이는 성은 그 자체로 하울이다.

 

하울이 가고자 하는 세계는 불분명해서 더 아름답다. 예측하기도 어렵고, 꼭 가야한 하는 곳은 없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들과 자유로운 삶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찬란하다.

 

성이 가는 곳은 그 자체로 길이 된다.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기찻길도 포장도로도 아닌 자신만의 길. 남들이 선택하지 않은 길을 걷기 위해 치뤄야 하는 대가들이 있겠지만 어쩐지 움직이는 성이 가는 길에 나도 올라타 바람을 쐬고 싶다. 그곳은 마법사들이 지키고 유지하려는 마법의 힘, 화려한 황실의 부, 마법사의 명예와 권력은 없지만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이 분다. 더불어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다.

 

성이 어디로 가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성이 만들어가는 세계를 켈시파도 황야의 마녀도 하울도 소피도 다 아끼고 소중히 여긴다. 연대와 공존, 평화와 사랑, 산뜻한 바람이 부는 곳에서 먹는 따뜻한 차 한잔, 맑은 햇빛에 빨래를 널고 아름다운 노을을 볼 수 세계. 성이 움직이며 우리에게 제시하는 아름다운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