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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내 안의 '너' 잠재우기

by 찬란한 너 2023. 1. 24.

곱고 앳된 주인공들

가속화된 핵전쟁을 피해 아이들을 태운 비행기가 하늘을 날고 있다. 하지만 비행기는 이내 태평양 한가운데에 사고로 추락하게 된다. 다행히 소년들은 살아남게 되지만 그들을 돌봐줄 어른은 없다. 제복을 입은 소년들은 대여섯 살에서 열두 살까지 다양했지만 그 누구도 자연 상태의 무인도에서 생존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아이들은 하루 이틀 무인도에서 지내면서 자연스레 제복을 벗는다. 뜨거운 햇살과 더위, 바닷물에 제복은 거추장스러운 껍데기일 뿐이다. 나체의 아이들은 연장자인 랠프와 잭, 피기를 중심으로 삼삼오오 짝을 이뤄 먹을 것, 구조신호, 잠잘 곳 등을 찾게 된다. 

자연스레 연장자이자 경험이 많은 랠프와 잭, 피기가 아이들을 리드해 가기 시작한다. 랠프는 바닷가의 소라를 이용해 발언권을 아이들에게 나눠주며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문제를 해결해 가려 시도한다. 랠프의 태도는 민주적이며, 선거를 통해서 대장으로 선출된다. 그리고 대장 랠프는 잭과 그를 따르는 소년들에게 사냥꾼 직책을 맡기며 자연스레 2인지 자리를 맡기게 된다. 피기는 상황을 빠른 속도로 파악하고 구조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불을 피워 아이들을 추위와 어둠의 두려움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돕는다. 피기는 마치 선사시대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주는 그리스의 신 프로메테우스를 연상케 한다. 앞을 예측할 수 있는 지혜로운 신, 프로메테우스와 피기는 어쩐지 닮아있다. 피기는 안경을 통해 앞날을 예측해서 해결책을 내놓고 불을 피워 구조신호를 기다리며 희망을 이야기한다. 

불을 피우는 과정, 먹거리를 구하는 과정에서 잭의 태도는 점점 변화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랠프와 피기의 의견을 따르고 함께 협업하지만 이내 창을 만들어 손에 쥐고, 피기의 안경을 뺏어서 마음대로 사용하고, 발언권이 없을 때에도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욕망과 화를 표출하기 시작한다. 창을 만들고 얼굴에 색칠을 하며 숲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는 잭은 점점 야생의, 야만의 존재가 되어 간다.   

랠프와 피기는 불을 피워 구조신호를 기다리고 몸을 보호할 오두막을 짓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잭은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구조신호 따위는 신경 쓰고 싶지 않게 된다. 갈등이 고조될 시점, 숲을 탐색하던 아이들은 짐승의 그림자, 알 수 없는 정체의 그림자를 보고 두려움에 떨게 된다. 

 

파리대왕의 등장  

처음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게 되면 파리대왕이 언제쯤 등장하게 될지 궁금해진다. 엄청 거대한 파리대왕을 상상하며 영화나 소설을 보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대왕'을 기반으로 한 이 영화는 SF 판타지가 아니다. 예상과는 달리 거대한 괴수 파리대왕은 영화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 처음 파리대왕의 존재를 알아보고 대화를 나누는 인물은 사이먼이다. 사이먼은 조용하고 소심한 성격의 소년이지만 감수성이 예민하다. 신비롭게도 자연과 소통하는 사이먼은 무리에 섞이지 않은 채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다 잭이 사냥한 돼지머리가 부패하여 달라붙은 파리떼와 구더기들을 바라보며 파리대왕과 마주하게 된다.


"넌 여기서 혼자 무엇을 하고 있는 거냐? 넌 내가 무섭지 않으냐?" 사이먼은 고개를 저었다. "너를 도와줄 사람은 이곳엔 아무도 없어. 오직 내가 있을 뿐이야. 그런데 나는 '짐승'이야." 사이먼의 입이 한참 애를 쓰더니 똑똑한 말소리가 새어나갔다. "막대 위에 꽂힌 암퇘지머리야."

"나 같은 짐승을 너희들이 사냥을 해서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참 가소로운 일이야!" 하고 그 돼지머리를 말하였다. 그러자 순간 숲과 흐릿하게 식별할 수 있는 장소들이 웃음소리를 흉내 내듯 하면서 메아리쳤다.

"넌 그것을 알고 있었지? 내가 너희들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아주 가깝고 가까운 일부분이란 말이야. 왜 모든 것이 틀려먹었는가, 왜 모든 것이 지금처럼 돼버렸는가 하면 모두 내 탓인 거야."  <파리대왕>  (윌리엄 골딩, 민음사) 일부 발췌

 


영화 속에서 환상적인 이미지로 묘사한 부분이 소설에서는 의미심장한 대화로 표현되어 있다. 사이먼의 환상 속에 등장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파리대왕은 성경에 등장하는 파리들의 왕이다. 이스라엘 서쪽의 해변 블레셋에 살고 있던 에글론 족 사람들이 섬기던 우상이라 알려진 바알세붑은 파리들의 왕이다. 파리는 부패하고 더럽혀진 가운데에 자리해 생명을 이어가는 존재이다. CSI : 라스베이거스 편을 즐겨보는 사람이라면 주인공 길 그리섬 반장이 피해자의 사망 시각을 파리 유충 및 벌레들의 종류를 보고 추정하는 장면을 자주 보게 된다. 생명이 사라진 죽음의 자리에 제일 먼저 생명의 씨앗을 퍼트리는 곤충, 바로 파리이다. 가장 더럽고 가장 부패한 곳에 자리해 자신의 종족을 퍼트리고 키워가는 존재. 그런 파리들의 대왕을 성경에서는 사탄, 악마, 부패하고 부정한 것의 상징적 의미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악마의 형상을 한 괴수도 아닌 파리대왕의 실체는 무엇일까?   

 

내 안의 파리대왕과 마주하기

영화와 소설의 처음, 섬 밖에서 어른들은 자신들의 욕망과 힘의 불균형에서 발생되는 여러 두려움을 핵전쟁을 통해  해결하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들이 말하는 질서와 평화, 공존의 메시지를 야무지게 갉아먹으며 말이다. 그러는 사이 아름답고 고운 소년들은 섬안에 갇혀 불로 희망을 피워야 할지, 고기를 구워야 할지 몰라 서로에게 창을 겨누다 끔찍한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잭과 무리들이 첫 돼지사냥에 성공하고 불을 피우기 위해 잭의 안경을 뺏고 랄프를 죽이기 위해 창을 휘두르는 과정을 보다보면 아이들 안에 살아 숨 쉬는 파리대왕의 실체와 마주하게 된다. 사냥감을 향한 무차별적 폭력과 알 수 없는 짐승의 그림자로부터 시작된 공포와 두려움은 잭과 사냥꾼 무리들을 광기에 사로잡히게 한다. 그들의 본능과 광기는 결국 선을 넘어 동료를 공격하고 죽이기에 이른다. 하얀 피부에 앳된 얼굴을 한 작은 몸의 아이들은 어떻게 죄책감도 없이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을까? 어떻게든 랄프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어떻게든 피기의 안경을 손에 넣기 위해 폭력을 자행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처음 제복을 입은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라져 있다.

더럽고 찝찝한 제목과는 다르게 다섯살에서 열두 살에 이르는 아이들을 섬에 가두고 보여주고자 했던 진실은 무엇일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 내면에도 파리대왕이 존재한다는 진실. 어쩌면 순자의 성악설이 맞을 수도 있다는 진실. 문명의 빛으로 야만의 어둠을 비춘다 하더라도 인간의 추악한 본능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진실. 자신의 쾌락과 본능적 욕구를 위해서는 그 무엇이든 파괴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진실.

이건 단지 영화속, 소설 속의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 파리대왕이 사이먼과의 대화에서 이야기했듯.  내 안에도 존재할 파리대왕을 어떻게 마주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 안의 파리대왕이 활개 치며 날아다니지 않게 할 수 있을까?

부패되어 썩어가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나와 주변을 살펴보게 된다. 그곳에 파리대왕이 자신의 알을 낳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게 하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