얌마, 도완득!
나는 이 영화의 결말이 좋다. 뻔해 보이기도, 낭만적이기도 해서 현실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런데 어쩌랴!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영화 속 인물들과 같이 웃고 있는 날 발견하게 되는 걸. ‘내가, 내 이웃이, 이 세상의 완득이들에게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어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바람이 생기는 걸.
완득이는 많은 사회적 약자를 앞에 내세워 세상의 현실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완득이의 아버지는 등이 굽은 꼽추였고 어린 시절부터 같이 살지 않은 엄마는 존재조차 희미해졌다. 생계를 이어가도록 했던 카바레가 문을 닫게 되자 아버지와 삼촌은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춤추며 장사를 할 곳을 찾아 떠돌았다. 완득이는 거의 혼자 일상을 지내야만 했다. 18살 고등학생이 된 완득이의 일상을 뒤흔드는 사건은 동주선생님과의 만남이었다. 동주는 입만 열면 욕과 막말을 일삼는 사회비판적인 시각이 강한 사회과목 선생으로 완득이의 담임선생님이다. 유독 완득이에게 지나친(완득에게는 굳이 불필요한) 관심을 보이며 “야 인마, 도완득”을 불러대지만 완득이는 반갑지가 않다. 심지어 완득이가 처한 현실 - 어머니의 부재, 아버지의 장애, 기초수급자 -을 반 아이들 모두와 공유하며 완득이를 부끄럽게 만든다. 심지어 완득이에게 주어진 수급품 마저 빼앗아 먹는 자유롭고 독특한 교사이다.
동주의 지나친 관심이 자신의 일상을 침해한다고 생각했던 완득이는 동주선생을 미워한다. 심지어 살아 계신지도 몰랐던 자신의 엄마가 실은 필리핀 국적의 ‘이숙희’라는 이름의 이민자였고, 자신이 다문화가정의 아이라는 진실마저 일깨워주자 완득이는 자신의 정체성에 심한 혼란을 겪게 된다. 알고 싶지도 않은 자신의 과거를 일러주며 귀찮게 하는 동주선생이 증오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후 엄마와의 재회, 자신의 새로운 꿈을 발견하며 동주선생과의 의미 있는 관계로의 전환이 이뤄진다. 영화는 완득이의 심리적, 정신적 성장을 아름답게 다루며 마무리된다.
망망대해를 떠도는 '자아'라는 배
완득이는 엄마와의 재회를 통해 본격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과 갈등을 느낀다. ‘삶에 변화가 있기 전’ 자신의 외롭고도 고독한 현실, 나아가기 힘든 현실을 그저 묵묵하게 수용하고 받아들이며 우울한 감정을 내면화하는데 집중되었던 과거의 시간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동주의 지나친 관심과 엄마와의 재회로 자기를 새롭게 인식해 가기 시작한다. 유예되고 보류되었던 자아에 대한 인지가 시작되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완득이의 자아인지 및 자아정체성은 겉으로만 보기에는 이민자 엄마와 꼽추 아빠, 지체장애인 삼촌으로 대변되는 다문화가정의 불우한 환경으로 인해 불량청소년으로 인식되기가 쉬어 보인다. 하지만 완득이는 불량청소년이 되기는커녕 자신만의 꿈을 찾는 바람직한 청소년으로 성장한다. 무엇이 완득이라는 스칼라가 바르고 온전한 벡터를 갖게 되는데 동력이 된 것일까?
첫째 완득이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자아의 성장 덕분이다. 인지체계는 아직 아동기에 가깝지만 완득이는 어려서부터 자신의 어려운 환경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며 아버지와 삼촌과의 따스한 유대관계를 유지한 덕분에 좋은 감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자아는 필리핀 출신의 이민자 엄마를 만났을 때에 그녀를 엄마로 받아들이는 데 있어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 완득이와 밀접한 관계인 엄마, 아빠, 삼촌은 사회적으로는 약자계층이지만 성실하고 근면하며 순수한 태도로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소시민들이다. 완득이가 그들로부터 다양하고 멋진 문화를 전수받지는 못했지만 주어진 삶에서 남을 괴롭히거나 폭력에 물들어 자신의 삶을 망치게 내버려 두는 불안정한 감정의 소유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완득이 주변의 어른들은 완벽주의자도 완벽함을 위해 애쓰는 존재들은 아니다. 불완전하지만 인간적인 면모를 유지한 어른들이다. 아버지와 삼촌과의 유대, 조심스럽고 섬세한 어머니의 등장으로 불완전하지만 이상적인 가족의 형태가 갖춰지자 완득이가 온전히 서기 시작했다. 한쪽으로 삐뚤어져 있던 몸도 점점 바로 세워지기 시작한다. 이는 일견 한 부모 또는 다문화 가정의 가난한 청소년들이 사회에 부적응자가 될 것이라는 편견을 깨는 부분이기도 하다. 물적으로 풍요롭지는 않지만 자신을 위해 애쓰는 한 명의 파수꾼이라도 있다면 아이가 바르게 자라날 가능성은 높아지는 것이다.
두 번째는 동주선생님 덕분이다. 존재감이 없는 완득이의 이름을 계속해서 불러내며 반 안에서 사회적인 자아를 갖게 한다. 또한 가난이 부끄러운 일이 아님을 일깨우기도 하고 엄마라는 존재가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하고 다행스러운 일인가를 철학적으로 일깨워주기도 한다. 동주 선생이 사회과목 선생님이고 실천하는 지성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의 희망이 엿보인다. 자아정체감 형성이 주된 발달과업인 청소년 시기에 자아정체감을 형성하지 못하면 불확실감과 불안정감, 단절감 등의 감정을 갖게 된다. 완득이도 폭발하는 불안정한 자아를 분노나 폭력적인 모습으로 내비친다. 그러나 동주선생의 지나칠 정도의 관심과 세상을 바라보는 멋진 관점들이 완득에게 깨달음을 주는 언어로 제시되면서 새로운 세계를 선물하게 되는 것이다. 정체감 혼미에 빠져있던 완득에게 정체감 유예와 정체감 성취 그 어딘가로 방향을 가질 수 있게 동주선생의 독려가 큰 힘이 되었다.
동주선생님은 꼰대의 모습보다는 민주적인 방식으로 완득이를 성장시키는 제2의 아버지 같다. 심지어 사회적인 편견이 없어서 완득이의 아버지와 어머니, 철없는 이웃들을 낮춰보거나 깔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가난하지만 성실하고 인간적인 이웃들과 사이좋은 환경을 만들 이 위해 연대할 줄 아는 어른이다. 심지어 이웃들과 함께 할 때 완득에게 사회적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정체감 성취에 필요한 여가 및 체험활동을 제시하기도 하고 킥복싱에 대한 오해를 가진 아버지를 설득해 완득이의 분노나 화를 건강한 방식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는 내게로 와 꽃이 되었다.
동주선생님은 완득이의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완득이의 존재감을 일깨웠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의 존재감을 드러내주는 행동이다. 더불어 완득이의 불완전한 정체감을 채워 줄 엄마까지 찾아서 만나게 해 준다.. 일련의 시간들은 그들의 유대를 끈끈하게 하였고, 많은 우여곡절 끝에 동주선생님의 진정성과 정성에 완득이는 마음을 열게 된다. 청소년기에 자신이 몰입하고 하고 싶은 것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여정의 첫 발을 디딜 수 있게 되는데 동주선생님은 완득이가 킥복싱을 할 수 있게 적극적인 조력을 아끼지 않는다. 완득이가 진짜로 원하는, 진심으로 하고 싶은 것을 동주선생님은 알아봐 주었기에 완득이는 자신의 삶에서 더 이상 소외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동주선생의 이름 부름은 완득이가 자신만의 알에서 깨어 나와 새가 될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부정하던 어머니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꽉 채워진 완득이가 어머니께 신발을 선물하는 장면에서 신발가게 아주머니가 던진 ‘누구냐?’는 질문에 ‘저희 어머니예요’라고’ 말할 때 완득이는 세상에 향해 걸어갈 두 발을 온전히 디딜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완득이는 두 번 태어난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한 번, 정신적으로 한 번.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히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는 김춘수의 시처럼 나도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 꽃이 되게 하고 싶다.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어 삶을 살아가는 동력이 될 수 있게 되길 바라게 되는 영화이다. 그나저나 완득이는 복싱 선수가 되었을까? 동주선생님은 이웃 처녀와 결혼해서 예쁜 아이를 얻었을까? 만약 동주선생님에게 아이가 생긴다면 어쩐지 완득이가 좋은 멘토가 되어 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